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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죽문학

단편 | 돌죽문학) 슬픔을 짊어지고서_0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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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쓰는유동 작성일19-07-08 15:10 조회7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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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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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물건도 그런 물건이 없다니까?"

방앗간 아낙네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키득거렸다. 젊은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낙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세상에, 진짜 저 탑만하다니까?"
"농담하시는거죠?"

젊은이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아낙네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 들어봐봐. 그 커다란 게 진짜 솟아오른다니까?"
"설마요."
"에이, 아가씨가 아직 젊어서 그런 걸 못본게지?"

아낙네는 말이 안된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첨탑을 번갈아 쳐다보는 젊은이를 보며 키득거렸다. 타지에서 찾아온 이 아가씨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많았다.

"아니, 아주머니. 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 봤는데요..."

젊은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진짜 저 탑만한 크기라고요?"
"그렇고말고. 근데 그것도 그냥 크기만 한게 아니래도?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네?"

아낙네는 자세를 고쳐 앉더니 손을 흔들며 말하기 시작했다.

"자, 들어봐봐. 내가 아가씨 또래 정도 되는 나이였을 때 말이야..."


젊은이는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난롯불을 쬐며 곰곰히 생각했다. 방앗간 아낙네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대략 스물 하고도 둘 해 전, 전지자가 마을에 찾아왔을 때 전지자를 가장 먼저 만난 이였다. 전지자에 대한 많고 많은 소문이 있었고-전지자가 사실은 반신족이라느니, 성전사들에게 마력을 빼앗긴 강령술사라느니, 이미 죽어 지박령이 되었다느니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소문들은 대부분 허풍이었거나,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딱 하나, 젊은이의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진위를 밝혀낼 도리가 마땅찮아 사실상 허풍인 건 다름없었으나, 그것은 다름아닌 '수정'이 언급되는 유일한 이야기였다. 젊은이는 반쯤은 설렘으로, 반쯤은 소름끼침으로 몸을 떨며, 밤의 어둠 사이로 우뚝 솟은 납색 첨탑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저게 다 통째로 오렌지색 수정이라고?

한 달 전, 수정 대장간의 대장장이 양반이 말했다. 이 마을의 전지자가 지키는 아쉔자리의 제단에, 평생 갑옷을 만들도고 남을 오렌지색 수정이 있다고. 젊은이는 그것이 좀 커다란 크기의 제단이거나, 여러 개의 제단이 있다는 소리로 알아들었다.

근데 첨탑 하나가 통째로 제단이란 소리는 없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이를 동요케 하는 것은, 첨탑이 세워지게 된 과정이었다. 그것은 전지자가 이 마을에 자리잡게 된 이야기이도 했다.

시커먼 후드와 잔뜩 기운 망토를 뒤집어써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던 차림의 이방인. 그 혹은 그녀는 스스로를 아쉔자리의 사도, 전지자라 소개하며, 지금은 세상을 떠났으나 한때 마을의 촌장이었던 방앗간 주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마을 한가운데에 아쉔자리를 모시며 여생을 보낼 제단을 만들도록 허락해주는 대신, 마을 사람들이 불행할 일 없도록 자신의 지혜를 나눠주겠노라고.

촌장은 전지자의 지혜가 정말 도움이 될지 한 달 동안 유예를 두고 지켜보겠노라고 했다. 첫날부터, 전지자는 마을에 숨어있던 이레데렘눌의 추종자들을 쫓아냈다. 셋째 날, 전지자는 농경지 측량을 위해 찾아온 진의 사제들을 상대로 `아무런 불법 없이` 거의 절반에 가까운 값만 납세할 수 있도록 촌장을 도왔다. 일주일 째, 전지자는 마을을 습격할 도적떼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며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생포해 현상금을 벌 수 있도록 도왔다. 보름째 되는 날엔 마을의 밭을 둘러보며 그 해에 어느 밭이 풍작일지를 알려주었고, 한 달째 되는 마지막 밤에는 마을 광장에 앉아 어린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을을 웃음으로 가득 채웠다.

촌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전지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지자가 지팡이로 광장의 정중앙을 톡톡 두드리자, 마치 수면에 파문이 일듯 광장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거대한 수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탓에 무슨 색의 수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잔뜩 놀란 촌장에게, 전지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드를 벗고 인사를 건네며, 부드럽게 솟아오르는 수정 위에 앉았다. 그렇게 전지자는 지금의 첨탑이 된 수정의 꼭대기에 망월대를 세워,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방앗간 아낙네의 이야기는, 촌장의 딸인 자신도 그때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며, 오직 자신과 아버지 촌장만이 그 광경을 보았다고 자랑하는 것으로 끝났다. 젊은이가 조심스럽게, 그래서 후드를 벗은 전지자는 어떤 모습이었느냐고 물어보자, 그 또한 너무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는 대답뿐이긴 했지만.


"그럼...저게 왜 지금은 오렌지색이 아닌걸까요?"

야간 순찰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경비병에게 젊은이가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경비병은 하품하며 말했다. 젊은이 역시, 하룻밤을 꼬박 새운 탓에 그녀를 따라 길게 하품을 했다. 저것이 정말로 오렌지색 수정이라면, 하는 생각이 가져온 설렘과 의문 탓에 젊은이는 밤새 잠을 설쳤다. 이제 마악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는 아침, 한때 오렌지색이었으리라 여겨지는 첨탑은 칙칙하고 탁한 납색이었다.

"아. 커피...커피 줘 커피."

경비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커피...비싼건데..."
"나한텐 반값에 준다고 했잖아..."
"그건 두루마리만..."
"...몹쓸 고자그 같으니..."

"헤헤..."

경비병은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한 듯, 갑옷도 벗지 않은 채 의자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잠들었다. 젊은이 역시 비몽사몽한 시선으로 첨탑을 바라보다가, 안락의자에 기댄 채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젊은이는 새가 되었다. 커다란 순백의 날개로 높다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 매보다도, 독수리보다도 높은 곳에서 바람을 타고 유유히 활공하는 새. 환하게 빛나는 태양 아래,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

그러다가, 새는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구름 아래로 비치는 대지, 그곳의 녹음은 어떤 빛깔일지를 기대하며 새는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새는 추락했다.


젊은이가 눈을 떴을 땐 벌써 정오였다. 젊은이는 부스스한 머릿결을 넘기며 눈을 깜빡였다. 경비병이 앉아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으나, 대신 식어버린 커피 한 잔과 비어있는 잔 하나가 있었다. 젊은이는 눈을 비비며 볶은 커피콩 자루가 제대로 여매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습기차면 큰일나니까, 하며 커피콩들을 살펴본 다음엔, 설탕 주머니와 주전자가 제대로 정돈되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모두 이상 없었다.

커피 끓이는 법도 알고, 의외로 교양있는 사람이라니까.

젊은이는 피식 웃으며, 마지막으로 커피값이 어디에 있나를 확인했다. 금화 한 푼 없었다. 대신, "외상 고마워 :D"라고 적힌 쪽지만 덩그러니 젊은이의 모자 챙에 꽂혀 있었다. 젊은이는 탐욕스러운 자 고자그 임 사고즈의 격언, "피붙이에게도 외상은 베풀지 말라"를 떠올리며 쪽지를 곱게 접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정오의 태양빛 아래에서, 마을의 시장은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했다. 갓 구운 호밀빵 냄새, 소금에 절인 고기 냄새, 건자두와 사과 파이 냄새...모두가 고자그 신도인 대상단과는 달리, 여유롭고 일상적인 따뜻함. 젊은이는 이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젊은이가 자리잡은 가게는 조금만 걸어가면 시장에 갈 수 있는 위치였다. 이른바 장전앞이라 이말씀이지, 젊은이는 여관주인에게 건물을 사들이며 했던 말을 되새기며 미소지었다.

"아, 두루마리집 아가씨구만."

꼭 딥드워프처럼 수염을 다듬은 식당 주인이 인사를 건네자, 젊은이도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아저씬 오늘도 표정이 밝으시네요?"
"하하! 이곳 사람들 모두가 그렇잖나!"

젊은이에게 자리를 안내하며 식당 주인이 호탕하게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이 마을의 사람들은 다들 활기차고 매일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이렇다할 가뭄이나 홍수의 흔적도 없고, 논밭은 영글어가는 곡식과 채소로 가득한 마을. 과하지도 않고 적당한 수준의 사치와 오락을 즐기는 사람들. 어린 시절부터 대상단에서 자라온 젊은이게, 이곳 변두리 마을은 꼭 고즈넉한 시골 휴양지의 느낌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오늘도 완두콩 푸딩이 추천 메뉸가요?"
"그렇다마다. 아, 오늘은 폭찹도 추천한다네. 아침에 꽤 토실토실한 녀석을 잡았거든."
"그럼 둘 다 먹죠. 아, 치즈도 괜찮은거 있죠?"

젊은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식당 주인도 웃으며 주방에 완두콩 푸딩과 폭찹 하나, 그리고 치즈 몇 조각을 준비하라 외쳤다. 주방에선 그에 못지않게 호탕하고 쾌활한 목소리로 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것보다, 자넨 거의 매일같이 여기서 점심을 먹는군,"
"여기서 오트밀이나 감자만 먹긴 아깝잖아요?"

젊은이는 고개를 으쓱하며 미소지었다. 식당 주인은 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껄껄거렸다.

"명색이 고자그 신돈데요. 돈 좀 써야죠. 대상단에선 누가누가 비싸고 많이 먹냐로 기싸움도 하는걸요 뭘."
"웃긴 양반들일세. 거 그냥 배불리 맛있게 먹으면 그만 아닌가?"
"에휴, 그러니까요."

젊은이는 대상단의 상인들이 만찬 때마다 보여주던 `식비 경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하다못해 페다스 마다쉬 신전에서 대상단이 머무를 때, 누가 더 고급진 보존식을 대량으로 사들이냐는 걸 두고 눈치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고자그의 신도답게,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만족도를 얻도록 치밀하게 계산해가며 말이다.

"근데 그것도 그거지만."

젊은이는 식당의 차양막에 반쯤 가려진 첨탑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되게 질좋은 식재료들이 많이 나거든요. 안먹으면 죄송할 정도로요."
"오? 그정돈가?"
"그럼요. 되게 정직하게 맛있는 재료들이 많아요. 밀도 그렇고, 고기도 그렇고..."
"그렇게 말해주니 괜히 내가 기분이 좋구만."

식당 주인이 머쓱하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젊은이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더니, 첨탑을 향해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칭찬은, 나 말고 저어기 전지자님께 드리게나."
"역시, 이것도 전지자님 덕분에 가능한 풍요로움인가요?"
"당연한 소릴. 저분만큼 농사와 목축에 지혜로우신 분을 내 평생 본 적이 없네."

식당 주인은 검게 물든 목걸이를 두 손으로 마주잡고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나지막히 기도를 올렸다.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젊은이는 그것이 아쉔자리에게 올리는 기도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젊은이의 뇌리에 한 순간 번뜩임이 일었다.

"아저씨, 아저씨!"
"음? 무슨 일인가?"

젊은이는 다시 첨탑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도 아쉔자리 신도죠?"
"보다시피. 끽해야 목걸이 하나만 묶은 게 고작이지만..."
"제단! 아쉔자리 제단이..."

젊은이는 첨탑을 향해 손을 쳐올리며 물었다.

"저 첨탑 맞죠?"
"아, 저 탑 말인가?"

식당 주인은 창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아쉔자리 님의 제단을 직접 본 사람은 우리 마을에 없네."
"그래서요?"
"그래서, 대신 저 탑을 제단 삼아 쓰고 있지. 전지자님께서도 그러라 하셨고."
"전지자님이 직접요?"
"음...아니?"
"그럼 누가요?"

식당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스스로도 말이 안되는 것을 아는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소문."
"소문이요?"
"전지자님께선 망월대를 내려오지 않으시잖나. 따로 심부름꾼을 보내신다는 얘기도 들은 적 없고."
"그럼 무작정 그런 소문들을 믿는거에요?"
"그렇다네! 좀 진지하다 싶은 얘기들은 다 진짜였거든."
"와우..."

식당 주인은 첨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쉔자리의 제단은 산산히 부서진 `오렌지색` 수정 제단 아닌가요? 저런 납색 수정이 아니라?"
"아, 왜 납색인지가 궁금한게로군."

젊은이가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첨탑을 향해 비장하게 손을 가리키고 있자, 식당 주인은 또다시 껄껄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네."
"아아, 아저씨도요? 아저씬 여기 오래 사신거 아녔어요?"
"오래 살기야 했지. 전지자님께서 오시기 전부터 살았으니까."
"그럼 언제부터 납색이 된건지는 아시겠네요?"

식당 주인은 수염 몇 가닥을 손가락으로 꼬며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처음부터 납색이었다만..."
"네?"
"아쉔자리 님의 제단이 오렌지색 수정으로 만드는건지는 모르겠네만, 저건 확실히 처음부터 납색이었네."

젊은이는 할 말을 잃은 채 식당 주인과 첨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자네 식사 나왔군."

식당 주인이 주방으로 향한 사이, 젊은이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첨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납으로 덧칠해진 수정은 아녔다. 젊은이는 세공용 정을 내려놓으며 첨탑에 기대 앉았다. 시금석이라도 있었으면, 진짜 오렌지색 수정이랑 비교해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시금석이 없으면 그 역할을 대신해줄 걸 써먹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 젊은이는 가게로 향했다.

젊은이가 다시 첨탑에 돌아온 건 한 움큼의 감정의 두루마리 묶음들이었다. 다들 논밭에 간 오후. 사람들에게 의심받는다고 쫓겨날 일은 없겠지만, 귀찮은 상황을 방지하려면 보는 사람이 없을 때 후딱 해치워야했다. 젊은이는 첨탑의 둘레를 따라 감정의 두루마리들을 연이어 줄줄이 늘여뜨려놓은 뒤, 마지막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두루마리에 쓰여진 주문을 읊었다.

그러나 두루마리들은 잠깐 반짝이다가도 반응이 없었다. 젊은이는 한숨을 쉬며 다시 첨탑에 기대어 앉았다. 이게 정말로 오렌지색 수정일까? 방앗간 아낙네는 그렇다고 했다. 경비병은 모른다고 했다. 식당 주인은 아예 처음부터 납색이었다고 했다. 젊은이는 재차 한숨을 쉬며 경합까지 남은 시간을 떠올렸다. 연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히 남아있었다. 다른 상품으로 갈아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얘, 너 여기서 뭐하니?"

익숙한 목소리에 젊은이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엔 경비병이 서있었다.

"언니 아까 야간 순찰 돈게 끝 아녔어요?"
"그냥 지나가다 들른거야."
"그런데 왜 아직도 갑옷 차림이에요?"
"내 맘이야. 자."

경비병은 아직도 주저앉아있는 젊은이를 향해 손을 건넸다. 징을 박은 두툼한 가죽 장갑을 낀 손. 젊은이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더니, 경비병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다 뭘 펼쳐놓은건지, 설명 좀 해줄래?"
"으아아아! 밟지마요!"

경비병이 첨탑의 둘레를 감싼 감정의 두루마리를 향해 걸어가자 젊은이가 외쳤다. 경비병은 놀라는 듯 하다가도 곧 웃으며 젊은이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젊은이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젓다가 자신이 펼쳐둔 두루마리를 하나하나 도로 주워 감아두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게 진짜라고 생각해요?"

3시 방향에서 젊은이가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뭐가?"
"이게 진짜 오렌지색 수정일까요?"

젊은이가 5시 방향에 놓인 두루마리를 집어들며 다시 물었다.

"음, 글쎄? 솔직히 아쉔자리 님의 제단이 그 오렌지색 수정일거라곤 생각 안해봤어."
"그래요?"
"응. 그냥 전지자님이 이걸 제단으로 쓰라고 했으니까, 아 이게 제단인가보다-했지."

젊은이는 7시 방향의 두루마리를 집어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었다.

"언니."
"응?"
"왜,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

젊은이는 9시 방향의 두루마리를 주웠다.

"가끔 사람들이 전지자한테 자문을 구하러 간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럼 전지자한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12시 방향의 마지막 두루마리를 집어들며 젊은이가 말했다. 경비병은 젊은이의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어...그럴거면 처음부터 만나지 그랬어."
"아뇨. 그땐 저한테 협상할 카드가 있는 줄 알았죠."
"그러고보니까, 너 무슨 비밀 계획 있다 하지 않았니?"
"맞아요. 전 그게 먹혀들 줄 알았거든요."

젊은이의 당초 계획은 이러했다: "마을의 상권을 장악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모든 걸 알고 있다는 전지자를 상대한다면, 아무리 철저한 계획을 세워도 실패할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오렌지색 수정을 사들인다는 목적과, 상권을 장악한다는 행동 사이엔 아무런 연관점이 없었다. 아무리 전지자라 한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계획을 알아내는 게 고작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상권을 장악한다는 건 분명한 현실이었고, 그녀는 마을에서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제가 오렌지색 수정을 살거라는 건 이 마을에서 언니랑 전지자밖에 몰라요."

그렇담 전지자는 어떻게 할까? 적극적으로 수정에 대한 정보를 은폐할까? 젊은이를 쫓아낼까? 둘 다 아니다. 그러나 분명 전지자는 젊은이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젊은이에게 유리한 상황을 어그려뜨려 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전지자가 행동에 나서는 순간 젊은이는 전지자의 끄나풀이나 시종을 고자그의 권능으로 매수한다. 전지자가 매수할 계획을 눈치채고 마을 사람들에게 침묵할 수도 있었으나, 전지자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곳 마을의 특성상 오래 침묵하진 못하리라. 그렇게 젊은이는 한 달 동안 전지자의 대응을 기다렸다.

전지자는 망월대에서 내려오질 않으니, 자신의 조언을 마을에 전해줄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 그렇게 매수한 심부름꾼을 통해, 오렌지색 수정이 전지자에게 있는지를 확인하고 전지자와의 흥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모든 걸 알고 있는 전지자와 아무런 협상 카드 없이 거래한다는 건, 손해가 손해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손해볼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고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못 찾았지요. 뭔가 마법으로 전달하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요. 전지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더라~ 하는 소문만 있고요."
"그렇지? 마을 사람들은 전지자님을 직접 만나뵌 적이 없으니까."
"그 방앗간집 아주머니도 젊었을 때 딱 한 번, 그것도 얼굴도 못알아보면서 본 게 고작이죠."
"그래서?"

젊은이는 고자그의 신도가 어쩔 수 없는 손해를 감수할 때의, 지극히 비장하고도 이를 악문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진짜 오렌지색 수정인지부터 확인해야죠. 지금처럼 별다른 정보 없이 계속 기다리다가 사실 이게 수정이 아니었다! 같은 상황이면..."
"오히려 그 편이 더 큰 손해다?"
"그렇죠. 차라리 여기서 진짠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진짜면 좀 손해를 보더라도 사는거죠. 가짜면 더 늦기 전에 손 털고 다른 상품 알아보러 가는거고요."

젊은이는 모자를 푹 눌러쓰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고자그 임 사고즈의 교리에 "여의치 않다면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여 더 큰 손해를 피해라"가 있기는 있지만, 대상단의 상인들 대부분은 그 교리를 지킬 상황 자체를 피해갔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정말로 손해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고자그 맙소사..."

하며 한숨을 쉬는 것이다.

경비병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젊은이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두루마리를 가방에 넣고 가게로 돌아가려던 젊은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 가자."
"네?"

젊은이가 모자를 고쳐 쓰며 묻자, 경비병이 첨탑 앞에 젊은이를 등지고 서며 말했다.

"전지자. 지금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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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병이 끓인 커피는 드립 커피 말고 터키식 커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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